한국 근대사에 더러운 이름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일당(一堂) 이완용(李完用)은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1858년에 출생하여 1926년 사망하기까지 그의 69년 일생을
자신의 영화를 위하여 매국·반민족행위로 장식했습니다.
이완용이가 민족수난기에 작위를 수여받고 군산과 충남일대의 평야를 있는대로 사들였으며
남대문 바깥 약고개에 커다란 저택을 만들어서
집 내부에 이것저것 멋진 장식물도 놓으면서 호사스럽게 살았던 것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민족에 반역하고 일제에 협력하는 행위로 얻어진 것이 아닐까요?
님이 궁금해하시는 일제시대의 악질 친일파 이완용이 호화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래에 나왔습니다.^^;
▶ 호는 일당(一堂)이며 이조판서 이호준의 아들이다. 이완용은 고종 19년 문과에 급제한 뒤 승지와 이조참의, 주서·규장각대교·홍문관수찬 등 여러 벼슬을 거치고 친러 내각의 외부대신을 지냈다. 광무 9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될 때 이하영·이지용·이근택·권중현 등과 함께 이른바 '을사 5적'으로서 고종을 위협하여 승낙을 받아냈으며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내각 총리대신의 자격으로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하였다.
▶ 1910년 8월 12일에는 황제에게 한일합방조약에 강제로 도장을 찍게 하여 그 공으로 백작의 작위와 15만 원의 은사금을 받았다. 그는 이 돈으로 전국 각지에서 많은 땅을 사 엄청난 땅부자가 되었으며, 최근 이 땅을 두고 이완용의 자손이 국가에 소유권 인정소송을 걸었다가 패소하기도 하였다.
▶ 이완용은 일본의 대한제국 침탈에 직접 참여했기 때문에 생전에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이완용은 일제 통치하에서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고, 3·1운동 때는 동포들에 대해 경고문을 여러 차례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 뒤 후작으로 지위가 오르고 70세까지 경제적으로는 호사스러웠으나 대역적이라는 민족의 지탄 속에서 병을 앓다가 죽었다.
이완용의 묘소는 원래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야산에 있었으나
해방 직후 이완용의 친일 행각에 크게 분노한 지역주민들이 이완용 일가를 몰아내려 했으며
그의 증손 이석형씨에 의해 파헤쳐져 시신은 화장.산골되었고
그의 관뚜껑은 모 대학 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같은 우봉이씨인 역사학자 이병도님에 의해 불태워지고 말았습니다.
(아래 사진이 명문친일파 이완용씨의 묘소입니다. )

최근까지도 이완용의 과거 행적을 미워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그의 묘소에는 식칼이 종종 꽃히고는 하였답니다.
이완용은 살아서는 호사스런 생활을 했을지언정 죽어서 저주를 받고야 만 것이죠.
한편 이완용의 장남인 이승구의 묘소도(경기도 고양시에 있음 : 다음 사진)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0165942
출처 : 인터넷 검색+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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